TOUCH 정기구독
정기후원
   

[칼럼] 사람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4-11-20 (목) 14:01 조회 : 3247
사람들
 
Ⅰ. 생각해 본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바로 앞에 아들이 앉아 있네요. 며칠 전 공들여 만든 레고총의 실제 모델을 인터넷에서 찾아 스케치하는 중입니다. 색연필을 쥐고 갈색과 회색으로 번갈아 칠하는 표정이 진지하군요. 방문 너머로는 딸이 영어 문장을 읽는 소리가 들립니다. 영롱한 울림이 귓가를 맴도네요. 방울새 노래 소리가 이렇지 않을까 상상도 합니다. 두 아이 사이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언어를 사용해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 사이에는 많은 감정들이 오고 갑니다.
 
함께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이며 얼마나 많은지, 그들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곁에 있어도 특별한 관계로 맺어지지 않으면 낯선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과 영향력이 낯설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전달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음을 발견한 사람들이라면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범위는 무한 확대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Ⅱ 감상해 본다
서세옥, <사람들>, 1986년, 한지에 수묵담채, 260*164cm
이런 생각을 하며 함께 보고 싶은 그림이 있습니다. 한국화가 서세옥(1929~ , 대구 출생)이 그린 사람과 사람들입니다. 그의 그림은 동양화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서양화의 비구상적인 요소들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한지 위에 먹으로 표현한 점 과 선의 변주들에 이어 그의 예술 철학은 사람에 관한 사색과 함께 더욱 본질에 다가가는 작품으로 형상화됩니다. 단숨에 그린 몇 획은 다양한 층의 농담으로 스며들어 사람이 되고, 넉넉한 여백은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홀로, 때로는 둘이서, 아니면 그 이상으로 끝없이 이어진 사람들은 서로 기대고, 손을 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층층이 쌓이기도 하지만, 함께 춤을 추기도 합니다. 감상하고 있자면 복잡한 생각을 단순한 모양으로 정리해주기도 하고 단순한 그림으로부터 복잡한 생각을 시작하게 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잡지도 놓지도 않는, 아니면 잡기도 하고 놓기도 하는 이런 그림이 참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들, 1986>은 한 사람이 집의 형상이며 좋은 생각이 거주하는 이런 집들이 연이어 지어져 감으로써 동네가 되고 사회가 되고 결국 좋은 나라가 되는 꿈을 꾸게 합니다.
 
Ⅲ. 읽어본다
 
<만인보(萬人譜)> 서시_고 은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서세옥이 그린 사람들을 보며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고은 시인의 연작 시집<만인보>가 떠올랐습니다. 제목을 그대로 풀면 만인의 계보입니다. 시인 자신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가장 암흑 같았던 시절에 이 시집을 구상하게 됩니다. 
 
1986년 연재가 시작된 이 연작시들은 2010년 4월에 30권으로 완간되었고 총 작품 수 4001편, 등장인물은 5600여명이라고 합니다. 세계 최초로 사람만을 노래한 연작시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작가가 유년시절부터 만난 개별적인 인물들을 실명(實名)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혼자 있으면 ‘나’ 라는 말도 필요 없으며 ‘관계가 우리 삶의 총칭’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생각에 구원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기독교 진리를 연결하여 묵상해 봅니다.
 
 
정호경 화가
 

   

QR CODE
foot_이미지
개인정보취급방침 이용약관 이메일무단수집거부